“신의 생각을 궁금해 하라!! ”
아인슈타인이 가장 궁금했던 것은 신의 생각이었다.
위대한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신의 생각이 궁금했다는 것은 머리를 쥐어짜서 뭔가를 발견하고 입증을 하면 또 뭔가 전체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
다른 이론이 필요할 뿐이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신은 죽었다.”고 했다.
정말 신을 부정한 것이 아니고, 종교인들이 성경을 오도하고 있기 때문에 불쌍하게 신은 죽었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위버멘쉬, 초인을 기다린다고 했다.
신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길을 찾아 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간이 되라는 말이다.
자신의 주관없이 군중심리에 이끌려 우왕좌왕하는 인간이 되지 말고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 되어 자신의 모습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파타 -
***아래에 좋은 글을 정중히 모셔 왔습니다.
[천도무친 – 天道無親]
빵부스러기 한 줌만 있어도 이 아이는 결코 굶어 죽지 않았을 것이다.
한 줌의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에 시달리다 세상에 절망하며,
이 어린 생명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아이에게 세상은 지옥이었으며, 삶은 저주였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죽으면 또다시 지옥에 가야 한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기독교의 교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악행과 온갖 부정을 다 저지르고도 예수를 믿는다는 ‘지적인 동의’ 하나만으로 천국이 보장된다면, 그런 교리는 ‘음주 운전자에게 보험을 들어놨으니 마음 놓고 술 퍼마셔도 괜찮다’라는 말과 같은 이치일 뿐이다.
노자는 “천도무친 상여선인 - 天道無親 常與善人”이라 하였다.
‘하늘의 도리는 특정인을 편애하지 않는다.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 할 뿐이다’라는 것이 노자의 주장이다.
바울이 노자의 도덕경을 한 번만이라도 읽었더라면, 혹은 사마천의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를 한 번만이라도 읽었더라면,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구원’이니 ‘메시아 재림’이니 하는 황당한 주장으로 세상을 혹세무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한국의 교인이나 목사들은 ‘전광훈’류를 비판하면서 자신과의 종교적 차별성과 도덕성을 부각하려 한다.
그러나 바울이 만든 기독교적 교리를 철저히 신봉하는 교조주의자라면, 그들 역시 독단의 도그마에 빠진 극단적 근본주의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유대인이나 기독인이 주장하는 야훼는 편애하는 ‘민족신’이요, 자신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수호신’에 불과하다.
그들은 야훼를 보편적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초월적 신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만을 위하고 자신들만이 부릴 수 있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쯤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하늘과 땅, 산과 바다가 어느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듯 하느님은 유대인과 기독인만의 神이 아니다. 하느님은 결코, 목사와 교인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창조주’ 신이 있다면 보편적 인류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며, ‘심판주’ 신이 있다면 ‘믿음’이라는 사행성 보험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한 구체적 결과물’로서 심판받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를 사후의 방편과 현세의 편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치명적 오류는 예수가 말한, ‘독사의 새끼’와 ‘사랑해야 할 원수’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사랑해야 할 원수는 교회 밖에 있지만,
독사의 새끼들은 교회 내에 서식한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만 한다.
교회를 다닌다거나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았다는 허황된 확신을 스스로 자신에게 세뇌하는 자들은, 죽는 날까지 날마다 자신이 독사의 새끼가 아님을 세상에 증명해 내야 한다.
저희끼리는 신앙공동체라 자처하지만, 대다수는 종교동호인의 세속적 이권연대이거나 종교를 매개로 한 권력 지향의 이권 카르텔에 불과하다.
아무런 삶의 변화조차 없이 예수를 믿었다는 ‘보험 영수증’ 하나 달랑 갖고서 사후의 보장성 보험이 적용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로또가 당첨되기를 바라는 환상에 불과하다.
교회에서 발행하는 사행성 보험에 의한 구원의 확신보다는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울려 오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자신의 삶에 훨씬 더 유익하다.
뿐만이 아니라 ‘심판주’ 신에게 자신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게 됨으로써 오히려 정상참작될 여지가 훨씬 더 농후하다.
‘절대 긍정’, ‘절대 믿음’이라는 불치병에 걸린 맹신자들은 세상과의 소통을 한사코 거부한다. 자신의 경험과 직관만을 우선시하며 자신이야말로 직통 신자임을 자처한다.
종교와 과학의 싸움은 이미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에서 끝났다.
아직도 여전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거나 남자는 갈빗대가 하나 더 적다고 하는 신화를 진리로 믿는 자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이치를 외면하는 면벽(面壁)한 인생들이다.
깨달음의 길에는 반드시 하나의 길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믿는 믿음은 주관의 세계일 뿐이다.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자신의 신앙에 확신이 있다면 내가 믿는 신앙과 타인이 믿는 신앙의 차이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더 나아가 상대방이 갖는 신앙의 관점을 ‘자신이 정해놓은 종교의 교리’란 틀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은 인간이 만든 교리에 구속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인류의 안녕을 위해 바울의 오류와 폐단을 바로잡을 초인이 나와야 할 때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서양의 기독교는 머지않아 반드시 역사 속에 소멸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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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소설가, 극작가. 1905년 파리에서 출생하여 1980년 사망했다.
유명한 페미니스트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으로도 유명하며 보부아르와는 부부적인 관계 이외에도 학문적인 동반자로서 서로의 원고를 검토해주는 평생 관계를 유지했다.[5]
실존주의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로 명명한 최초의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카뮈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자이자, 메를로퐁티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 및 현상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실존주의의 교황이라는 별명이 있다.
그 유명한 소설적 자유에 대한 개념을 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들은 철학에 관심이 없더라도 사르트르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또 반자본주의, 친 공산주의적 사상을 공공연히 드러내기도 해 파블로 피카소, 존 레논, 조지 오웰, 알베르 카뮈 등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좌파 예술가다.
* 어록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타인은 지옥이다. (L'enfer, c'est les autres.)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L'homme est condamné a être libre.)
모든 것이 해결되어 왔다. 사는 법 빼고는.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수중에 달려있다.
무릎 꿇고 사느니 일어서서 죽는게 낫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서 연약함 속에 존재를 이어가다가 우연하게 죽는다.
나는 존재한다. 그게 전부이고, 그래서 구역질이 난다.
3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시간이다.
체 게바라는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다.
반공주의자는 개다.
나는 이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바꾸지 않을 것이다.
배신자는 죄인의 기생충이다.